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이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설이나 신화 속으로 사라져가는 사람들이 있다. 전혜린 - 그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 그는 세계를 보고 왔다. 그래서 그는 서울의 거리에서도, 뮌헨의 카페 앞에서도 ‘손님'이었다. ... 그 여자는 짧은 생애를 가득한 긴장 속에서 살기 위하여 끊임없는 욕망을 불태웠다.” 전혜린은 1934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과대학 재학 중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기 위해,1955년 낯선 땅 독일 뮌헨에서 새 출발을 했다. 불꽃 같은 언어와 필치로 많은 번역과 저술을 남기고 그는 32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의 생을 완전히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삶과 정신, 그리고 투쟁 과정에 쓰여진 이 글들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반쪽자리 땅인 한국의 세상이 전부였던 스무 살의 나는, 먼 세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품고 5년이 넘게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5년 만에 다시 읽은 그의 책에서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고독감, 고국과의 거리감, 그리고 창작에 대한 소명의식에 크게 공감했다. 이는 나 또한 지속적으로 초월적이고 창조적인 것을 향한 선망과 표현 충동을 느껴왔으며, 근본적인 외로움과 자괴감을 겪고 난 후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지의, 혹은 다른 세계로의 여행이 큰 영감을 주었던 작가를 마주하면, 그들이 본 세계를 따라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그들의 창작의 원천과 배경에 대한 호기심이며, 나의 고도를 기다리다 마지못해 찾아가는 심리이기도 하다.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때 그 시절, 과거의 세계와 그것을 추적하는 작업을 하며 나의 시공간의 감각을 확장한다. 과거의 창작물 속에 있는 관념을 현재로 불러와 물리적 형태의 결과물을 내 손을 통해 다시 탄생하게 하는 일종의 소환 작업이다. 이를 일상의 균질적인 시공간으로 접근하여 재현하는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기에 재현이 불가능한 ‘지금, 여기’의 순간에서 말하고자 한다. 작가가 남긴 그 에너지가 여전히 생생하고, 따로 떨어져 나온 시간의 조각처럼 영원하고 박물관처럼 멈춰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꽃을 그린 화가 프리다 칼로처럼, 그 창조적 기운이 역사적 시간의 축적에서 끝맺는 것이 아니라, 호흡하는 현재의 시간과 또 다른 창작자인 나를 관통할 때 발생하는 영향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응시한다.
이처럼 내게는 누군가의 손에서 탄생한 작업물이 창작의 동기이며 영감의 원천이다. 이미 현재 사라진 자의 작품인데도 마치 살아서 내게 말을 건다는 느낌을 받는다. 전혜린은 불꽃처럼 살다가 스스로 운명한 지 오래인데도, 그의 유령은 영원히 남아 그 이후의 사람들에게도 ‘전혜린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중 한 명인 나의 몸을 통해 나와 공명한 그 유령을 닫힌 시간에 구멍을 내어 지금 여기로 소환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 작업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내게 시를 읊는 유령의 목소리를 청각화하고 시각화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가 32살의 생애 동안 쏟아낸 말을 내면에서 곱씹고, 꾹꾹 눌러쓴 그 문자 각각이 음을 이뤄 완성된 오르골 악보가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나는 소리>는 전혜린과 나를 관통하는 유목민적 정서, 향수(Heimweh)와 먼 곳에 대한 동경(Fernweh)를 동시에 가지고, 항상 어디론가 떠나면서 돌아오고 제자리가 사라지는 움직임에 대한 표상이다. <당신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는 동방의 여성이자 이방인으로서 살면서 항상 뒤따라오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스스로 타자가 되어 자기를 촉발하는 질문을 하고, 나의 근원을 모색하는 과정 안에서 모국어는 또렷하게 들려오고, 모국어가 아닌 언어는 투명하게 흩어진다. 또한 이는 모순적인 정서를 가지게 된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토록 타자로서 고독감과 거리감을 느끼는 데도 왜 고국을 떠나야만 하는가. 전혜린은 부둣가에 앉아 멀어지는 뗏목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어떠한 감동을 받는 것을 그 시작으로 말했고,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한다. 나의 사유와 전혜린이라는 유령은 형상을 드러내는 듯 하면서 외부의 개입에 의해 베일처럼 흩어지고 사라지며 섞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작은 구슬들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소리에 주목하여, 원격작용과 열린 호출을 은유한다. 전혜린과 나 사이 대화의 풍경을 조망하는 <포플러 나무 아래서>는 나무의 가지처럼 흔들리는 오브제와 이파리의 틈을 통과하는 볕뉘와 같이 일렁이는 그림자로 존재한다. 책에는 늘어진 포플러 가로수가 종종 등장하며 그가 유학했던 뮌헨이 묘사된다. 포플러 나무(Poplar tree)는 ‘대중의 나무’라는 그 이름의 의미처럼, 마음 속으로 느껴지는 포플러 나무 아래서 이 모든 작품들과 감상자 간의 상호작용을 유도하고 환대한다.
* 위 영상에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소리를 짧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